제1회한민족청소년글짓기공모대회 대상 수상작품
아버지
---고중 1학년 2반 한송철(韩松哲)
나의 아버지는 아주 평범한 사람이다. 그는 큰 직위에 있는 관원도 아니고 성공한 사업가도 아니며 시인, 작가 등 유명한 인사도 아니다. 아버지는 다만 3년전에 한국으로 돈벌이 나가 한국에 거주하고있는 아주 평범한 외국인 로동자이다.
많은 사람들의 시각으로 볼 때 그는 너무 평범하기에 별 볼일없는 동네아저씨이다. 그래서 비록 나의 아버지라 하지만 특별히 존중하지도 않았고 별로 친근감도 느끼지 못했다. 더우기 아버지가 한국에 간 첫해는 그래도 매학기마다 나에게 생활비와 용돈도 보내줬지만 근 2년은 돈 한푼 보내주지 않았고 무엇을 하느라 그렇게 바쁜지 전화도 한통 제대로 쳐주지 않았다. 금년에 들어서서 내가 고등학교진학을 위해 코피를 흘려가며 힘들게 공부를 하였는데도 별로 위로의 말 한마디, 전화한통 없었다. 그런 무관심한 아버지가 고깝게만 느껴졌다.
이번에 근 3년만에 아버지를 다시 뵐수 있게 된것은 할머니께서 갑자기 세상을 떴기 때문이다. “불효자”인 아버지는 할머니가 최근에 들어서서 그렇게 보고싶다할 때도 돌아오지 않고있다가 할머니께서 돌아가신 이튿날에댜 부랴부랴 서울에서 돌아와 이미 차가운 주검으로 된 할머니를 부둥켜안고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드문드문 혼자 작은 소리로 뭐라 중얼중얼 하는데 무슨 말인지 도저히 알아들을수가 없었다. 불효자로 할머니께 효도못한 통회라고 나는 생각하였다.
나의 동학들중에 많은 친구들의 아버지 혹은 어머니가 한국에 계신다. 가끔 혹은 생일때면 한국에서 새로 디자인한 핸드폰이나 금시 제일 멋진 노트북을 사서 보내준다. 어쩌면 그게 정말 부러웠다. 왜 나의 아버지는 한국에 간지 3년이 넘도록 나에게는 핸드폰이나 노트북은 커녕 내가 제일 좋아하는 구은 김마저 못사보내주는지?
나는 그런 아버지가 원망스럽기만 했다. 하여 이번에 아버지가 오래만에 돌아왔어도 난 별로 반갑지도 기쁘지도 않았다. 물론 이건 좀 철없는 행위가 아닐가 좀 찔리기는 하였다.
헌데 이번에 아버지와 함께 동행하여 왔던 한국교수님 한분이 나에게 본인의 책 몇권을 선물하면서 지금 아버지가 한국에서 돈버는 일은 잠깐 제쳐놓고 공부에 열중하고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였다. 정말 뜻밖이였다.
아버지는 할머니의 장례식을 치르고있는 동안 밥을 한숟가락도 삼키지 못하였다. 그저 다른 사람 몰래 혼자서 울기만 했다. 그것도 한밤중에 누구도 모르게.
나는 아버지가 자신을 낳아주신 어머님께 효도를 못해 통한의 눈물을 흘리는것을 조금이나마 짐작이 간다. 내가 어렸을 때 아버지는 가끔 나에게 “이 세상에서 누구를 제일 사랑하는가? ”하고 묻군 하였다. 그때마다 나는 “나를 낳아주고 잘 키워준 엄마를 제일 사랑해요.”라고 답하군 하였다. 그러면 아버지는 “우리 철이는 참 기특한 아이구나. 사람이라면 절대로 낳아주신 어머니의 은혜를 잊어서는 안된다. ”라고 하였다.
아버지는 워낙 과묵한편이여서 아버지와 동행해온 한국교수님으로부터 아버지의 상황을 알아듣게 되였다. 아버지는 민족애가 류다른 분이다. 날로 글로벌화되는 지구촌의 평화, 상생공존을 위하여 비록 늦은 나이지만 열심히 배우고 있는 아버지를 알게 되였다. 아버지는 나에게 다정한 아빠가 아니였고 할머니께는 효자가 아니였다. 그것은 확실하였다. 때문에 나는 수십번 수백번 아버지를 원망도 해봤다. 왜 나에게 용돈은커녕 생활비마저 넉넉하게 보내주지 않았는지? 왜 할머니에게 맛있는 음식을 사드시라고 명절에 두터운 용돈봉투를 못드렸는지?
하지만 이번에 나는 아버지의 진정한 속마음을 알게 되였다. 아버지의 인생길이 고독하고 험난할지는 모르지만 목표만은 확실했다. 세계 평화운동가 요한 갈퉁을 스승으로, 김구 , 김재규선생을 비롯한 유지인사들이 투쟁하여 걸어온 그 길을 이어받겠다는것이다. 지금 금전만능, 물욕이 넘쳐흐르는 이러한 시대에 민족과 겨례란 옛날 감투를 버리지 못하는 아버지가 어쩌면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아Q”같이 너무나도 가소로와보이겠지만 나는 그런 아버지가 더욱 존경스럽기만 하다.
아버지는 할머니의 장례식에 더없이 슬퍼했다. 압록강을 사이둔 신의주에 있는 할머니의 언니, 조카, 서울에 있는 언니, 동생, 조카 등 누구도 오지 못하였기에. 심지어는 서울에 있는 할머니의 친딸, 친사위마저도 못왔기 때문에. 할머니의 신세가 너무 가긍하였기에.
아버지는 할머니의 저세상길도 걸음이 묵직하였으리라 생각하였기에 그 슬픔은 더했다. 마지막 작별을 두고 평생 가슴속에 품어온 자식들의 그림자도 보지 못하고 눈도 못감은채 어찌 가볍게 떠날수 있었겠는가?
나는 지금 어리고 나약하지만 꼭 아버지를 본받아 세계평화의 길로 나아갈것이다.
서울쪽의 친척과 압록강너머의 친척들이 자유롭게 함께 모이는 그날을 기대하면서…
지도교원: 윤병화